하성래 은사님 회상기

■ 살레시오고 11회 동문회ㅣ살레시오고 서울동창회ㅣ살레시오고 총동창회

(사진 설명 : 천진암에서 천주교 성지 과정을 상세히 설명해 주시는  은사님 모습)

은사님께 식사라도 대접해 드리고자 해서, 1970년대 초부터 한 곳에서 쭉 살고 계신 자양동 자택을 방문하고, 천진암으로 직행하다. 처음 가본 곳이다. 물론 퇴촌지역은 가족과, 또 친구들과 더러 식사 때문에 가본 곳이고도 하지만, 이곳 천진암은 처음이다. 은사님은 이곳 사정을 너무나 소상히 알고 계셨다. 

눈이 내린 뒤의 질척거리는 길을 밟으며 산등성이를 올라 눈에 쌓인 성모님 상을 둘러보다. 기념 촬영을 하며 연구해 오신 말씀도 귀담아 듣다. 귀가 도중에 점심식사와 찻집에 들러 차담도 나누다. 남한산성을 거쳐 서울로 귀가하다.

◆ 천진암(天眞菴)은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천진암로 1203 에 있는 천주교의 성지이다. 조선시대 이곳에 있던 암자에 피신해 온 초기 천주교인들을 스님들이 피신시켜주고 보호해 주었다. 이로 인해 결국은 많은 스님들이 희생되었다. 

바로 이런 역사를 가지고 있는 천진암에서 한국 천주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암자터만 남아 있고 이 일대는 천주교에서 성당을 세우는 등 성역으로 개발 중이다. 이곳에는 천주교를 창립하는 데 공헌을 한 다섯 사람의 무덤이 있다.

규운(圭雲) 하성래(河聲來. 아우구스티노) 박사

(고교 재학시절. 하성래 은사님 근황)

    전남 화순에서 조선 후기 실학자 규남 하백원 선생의 6대손으로 태어나 조선대학교 졸업, 고려대학교에서 <천주가사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고려대, 수원 가톨릭대, 안양대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치는데 헌신하셨다. 

또한, 은사님은 인생을  '참고 견디고 이긴다'는 신념으로 사신다. 그 결과 저서로 <천주가사 연구>.<순교자 윤유일. 정은 평전>.<무명 순교자의 뿌리를 찾아서>, <빛의 사람들>, <나의 향기> 등과 몇 편의 중요한 논문을 남기신 바 있고, 40 여년을 줄곧 서울 광진구 자양동 단독주택에 거주하시다가, 2018년부터 근처 자양동 아파트로 이사하여 거주하고 계신다.

(하성래 은사님에 대한 소개)

우리들 살레시오 고교 재학시절의 국어선생님으로 재직하셨던 하성래 은사님께서 우리 모교에 대한 회상기. 

은사님께서는 학문 연구에 남다른 열정을 버리지 못하시고 고려대에서 <천주가사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에 교회사 연구에 전념하셨으며, 모교 동창회지 '벗 94호'(2002. 5. 30.) 초대석에 아래 내용을 기록한 바 있다. 

또한,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펴낸 [교회와 역사 : 2014.1월호 및 2014.2월호]에 게재된 은사님의 생생한 종교관 구술 내용을 발견하고, 은사님의 허락을 얻어 본 사이트 뒷면에 게재한다.

살레시오고교 재직 회상기

내가 살레시오에 부임한 것은 1965년, 떠난 것은 1974년, 10년을 근속하였다. 그때만 해도 나는 30대의 젊은 교사로 패기와 자신감에 가득차 있었다. 리날도 파키넬리(신부)신부님이 교장이셨다. 기 신부님은 이태리 출신의 사제로 귀족풍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화근이었다.

그분의 귀족적 풍모와 언동이 우리의 민족적 자존심을 자극하여 선생님과 학생들의 분노를 샀던 것이다. 분규가 일어나, 기 신부님이 서울 수도원으로 가시고, 아르키메데 마르텔리(馬신부) 신부님이 다시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마 신부님은 허허벌판인 태봉산 밑에 광주살레시오 건물을 짓고 개교하신 후 초대 교장을 역임한 분이다. 시골 할아버지처럼 후덕하고 소탈하였다.

서민적이며 유머와 애정이 넘쳤다. 분규가 수습되고 학교는 평화로워졌다. 학생들은 대단이 우수하여, 지금 생각하면 각계에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그 중에서도 나의 뇌리에 남아 있는 학생들로는 의학계로 진출한 정상우 이창수, 이호완, 김옥석, 김영호, 체육계로 진출한 이상국, 김승철, 문학계로 진출한 김종, 이상문, 정치계로 진출한 정동채, 김재균, 법조계로 진출한 유진 등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밖에도 김용식, 정종국, 윤중웅, 박광복, 박필균, 김동주 등 수많은 얼굴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어찌 이들뿐이겠는가? 함께 근무했던 선생님들, 사랑했던 학생 이름 하나 하나에 각각의 추억과 사연이 얽혀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내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선의의 학업 경쟁과 사랑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살레시오는 시설면에 있어서도 전국에서 으뜸이었다. 그 당시 다른 학교 건물들은 목조 건물. 아니면, 낡은 벽돌 건물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살레시오는 지진이 일어나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견고한 현대식 건물로, 교무실 옆의 안락한 휴게실과 수세식 화장실, 샤워실, 극장식 강당과 농구대, 정구장과 교내 풀장, 운동장 건너편의 푸른 잔디밭, 교문 안의 히마라야시타, 성모동굴 등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아침에 출근하여 현관을 들어서면 마신부님이 손수 끓여놓은 원두커피의 향기가 기분을 더없이 상쾌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이 향기로운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하루 일과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수업이 끝난 뒤 나는 가끔 혼자 남아 논문 자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럴 때면 마 신부님은 비스켓을 담은 접시와 커피 한잔을 가지고 와서 책상 위에 놓으며,

"이것 드시고 하세요."
하였다. 커피 향기보다도 그 정이 더 따뜻하였다. 내가 학문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이 학교의 이러한 따뜻한 정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인정과 시설보다도 지금 내게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은 살레시오의 인성교육이었다. 카톨릭 종교재단에서 운영하는 학교답게 착한 인성교육에, 교육의 한 목표을 두고 있었다. 

교문을 들어서면 현관 앞 정원 잔디밭에 '죄보다는 죽음을!'하고 씌어진 하얀 푯말이 하나 서 있었다. 죄를 짓기보다는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뜻이다. 이 말은 돈보스꼬 성인이 세운 학교의 학생으로, 그 성품이 너무도 착하여 17세의 어린 나이에 죽었지만 성인으로 시성된 성도미니꼬 사비오가 한 말이다. 

성도미니꼬 사비오는 전세계 카톨릭 청소년의 주보 성인이다. 나는 지금도 가끔 이 말을 되새기며 나 자신을 반성해 본다. 죄란 실정법을 어기는 것만이 아니다.

가장 무서운 죄는 양심을 속이는 죄다. 「중용」에서 말하는 '母自欺'다. 양심을 속이고 죄를 짓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성도미니꼬 사비오의 순수한 정신. 이것은 살레시오의 꿈이며 정신의 한 단면이다.♧

■살레시오고동창회ㅣ살레시오고동문회ㅣ살레시오동창회ㅣ살레시오동문회ㅣ살레시오고교동창회ㅣ살레시오고교동문회ㅣ살레시오고등학교동창회ㅣ살레시오고11회동문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