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레시오에 부임한 것은 1965년, 떠난 것은 1974년, 10년을 근속하였다. 그때만 해도 나는 30대의 젊은 교사로 패기와 자신감에 가득차 있었다. 리날도 파키넬리(신부)신부님이 교장이셨다. 기 신부님은 이태리 출신의 사제로 귀족풍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화근이었다.
그분의 귀족적 풍모와 언동이 우리의 민족적 자존심을 자극하여 선생님과 학생들의 분노를 샀던 것이다. 분규가 일어나, 기 신부님이 서울 수도원으로 가시고, 아르키메데 마르텔리(馬신부) 신부님이 다시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마 신부님은 허허벌판인 태봉산 밑에 광주살레시오 건물을 짓고 개교하신 후 초대 교장을 역임한 분이다. 시골 할아버지처럼 후덕하고 소탈하였다.
서민적이며 유머와 애정이 넘쳤다. 분규가 수습되고 학교는 평화로워졌다. 학생들은 대단이 우수하여, 지금 생각하면 각계에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그 중에서도 나의 뇌리에 남아 있는 학생들로는 의학계로 진출한 정상우 이창수, 이호완, 김옥석, 김영호, 체육계로 진출한 이상국, 김승철, 문학계로 진출한 김종, 이상문, 정치계로 진출한 정동채, 김재균, 법조계로 진출한 유진 등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밖에도 김용식, 정종국, 윤중웅, 박광복, 박필균, 김동주 등 수많은 얼굴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어찌 이들뿐이겠는가? 함께 근무했던 선생님들, 사랑했던 학생 이름 하나 하나에 각각의 추억과 사연이 얽혀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내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선의의 학업 경쟁과 사랑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살레시오는 시설면에 있어서도 전국에서 으뜸이었다. 그 당시 다른 학교 건물들은 목조 건물. 아니면, 낡은 벽돌 건물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살레시오는 지진이 일어나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견고한 현대식 건물로, 교무실 옆의 안락한 휴게실과 수세식 화장실, 샤워실, 극장식 강당과 농구대, 정구장과 교내 풀장, 운동장 건너편의 푸른 잔디밭, 교문 안의 히마라야시타, 성모동굴 등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아침에 출근하여 현관을 들어서면 마신부님이 손수 끓여놓은 원두커피의 향기가 기분을 더없이 상쾌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이 향기로운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하루 일과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수업이 끝난 뒤 나는 가끔 혼자 남아 논문 자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럴 때면 마 신부님은 비스켓을 담은 접시와 커피 한잔을 가지고 와서 책상 위에 놓으며,
"이것 드시고 하세요."
하였다. 커피 향기보다도 그 정이 더 따뜻하였다. 내가 학문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이 학교의 이러한 따뜻한 정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인정과 시설보다도 지금 내게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은 살레시오의 인성교육이었다. 카톨릭 종교재단에서 운영하는 학교답게 착한 인성교육에, 교육의 한 목표을 두고 있었다.
교문을 들어서면 현관 앞 정원 잔디밭에 '죄보다는 죽음을!'하고 씌어진 하얀 푯말이 하나 서 있었다. 죄를 짓기보다는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뜻이다. 이 말은 돈보스꼬 성인이 세운 학교의 학생으로, 그 성품이 너무도 착하여 17세의 어린 나이에 죽었지만 성인으로 시성된 성도미니꼬 사비오가 한 말이다.
성도미니꼬 사비오는 전세계 카톨릭 청소년의 주보 성인이다. 나는 지금도 가끔 이 말을 되새기며 나 자신을 반성해 본다. 죄란 실정법을 어기는 것만이 아니다.
가장 무서운 죄는 양심을 속이는 죄다. 「중용」에서 말하는 '母自欺'다. 양심을 속이고 죄를 짓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성도미니꼬 사비오의 순수한 정신. 이것은 살레시오의 꿈이며 정신의 한 단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