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래 은사님 회고2

■ 살레시오고 11회 동문회ㅣ살레시오고 서울동창회ㅣ살레시오고 총동창회

교회와 역사 -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2014. 2월호(제465호)

규운(圭雲) 하성래(河聲來. 아우구스티노) 박사

논문을 쓰고 나서 류홍렬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당시 류 선생님은 성균관대학 대학원장이셨다. 류 선생님이 “이렇게 논문까지 쓰고 천주교 신자가 아닌 것이 말이 되냐”며 “세례는 언제 받을 거냐”고 물었다. 내가 순순히 “곧 받겠습니다.” 했더니 그 자리에서 바로 전화기를 잡고는 “지금 사는 곳이 어디지?” 하더라.“가회동이요” 했더니 바로 가회동 성당으로 전화를 했다. 이계광(1) 신부님을 바꾸라 하더니 대뜸 “내가 사람 하나 보낼 테니 이마에 물 부어줘” 그러셨다. 

나중에 들어 보니 당시 가화동 본당주임이었던 이계광 신부님은 류 선생님의 제자였다. 곧 이 신부님을 찾아가 뵈었다. 이 신부님은 <사목>, <경향잡지> 등에 실린 내 글을 벌써 봤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교리를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으니 교리 배울 것도 없이 차나 마시면서 이야기나 하다가 부활절에 와서 세례받으면 됩니다.” 하셨다. 그래도 “제가 교리를 배우러 나오겠습니다” 했더니 그러면 “내가 부담스러워” 하더라. 그래서 결국 교리 공부는 안 나가고 부활절에 가서 세례를 받았다. 그때가 I975년이었다. 오기선 신부님께 “세례명은 어떻게 할까요” 했더니 “그건 대부가 정하는 거야” 하셨다, 류선생님께 물었더니 “자네는 학자니까 아우구스티노로 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물론 대부도 서 주셨다. 

내 신앙 이야기를 하면서 류홍렬 선생님을 빼놓을 수 없다. 대부로서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신 분이다. 말 그대로 아버지 대신이셨다. 류 선생님은 돈암동 성당에 다니셨는데 힘든 일이 있을 때 찾아뵙고 의논드릴 수 있어 참말 의지가 되었다. 내가 대학 강단에 설 때 추천서도 써 주셨다.
세례를 받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부모님도 딱히 뭐라 하지는 않으셨다. 우리 집안이 노론 골수였는데, 내가 천주교에 관한 글, 특히 다산 정약용에 관한 글을 자주 쓰니 아버지께서 ‘요새 네가 자주 남인을 옹호하는 글을 쓰던데 혹시라도 선대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조심해라’ 하는 편지를 보내셨다. 그 편지 한 번 뿐, 특별히 반대하거나 하지는 않으셨다. 
스스로 생각할 때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는데 어떤 거부감이 없었던 이유는 천주가사 연구를 하면서 내가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 권철신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권철신, 이벽. 정약전 이런 사람들 모두 대표적인 유학자이지 않았나.

천주가사 연구를 시작으로 천주교회와 관련된 다양한 논문을 발표하였고,(2) 여러 글을 신분이나 잡지, 사보 등에 기고했다. <자명종과 나경적이라는 사람>을 월간<뿌리깊은 나무>(1970년 11월호)(3)에 쓴 적이 있다. 나경적(4)은 규남 할아버지와 한 마을에 살던 과학자였는데, 당신의 이름을 듣고 야사리에 찾아온 홍대용(5)과 함께 혼의를 만들었다. 규남 할아버지도 자명종을 만드셨다. 당시 우리 집이 대단히 컸는데 사랑채에 걸어둔 자명종 소리가 안채까지도 들렸다고 한다. 한참 후에 그 자명종과 계영배(6)를 찾으러 규남 할아버지 셋째 아들의 처가 후손인 양문수 씨가 사는 순창에 갔다. 가서 보니 일제 때까지 계영배와 함께 자명종이 있었는데 일본 순사가 빌려 간 이후 돌려주지 않았다고 하더라. 정말 아까운 일이다.《뿌리깊은 나무》에 실린 글을 보고 오리엔탈이라는 시계를 만드는 회사에서 글을 써 달라고 연락이 왔다. 그 덕에 한국의 시계사(時計史)를 오리엔탈 사보에 오랫동안 연재했다. 

1975년에 쓴 김기호의〈피악 수선가〉를 한국교회사연구소 월례발표회에서 발표했다. 이후 박해 시대의 신학 교육과 성직자 양성, 황사영의 교회 활동과 순교에 대한 연구,《눌암기략》(7)의 저자 및 내용에 대한 소고,〈사학징의》의〈부요화사서소화기〉중 한글로 번역된 교리서, 초기 신자들의 교리 이해 등을 차례로 발표했다. 

1998년 5월, ‘선교의 자유와 대박 청래 문제를 주제로 한국교회사연구소, 주교회의 문화위원회, 배론 성지 개발위원회, 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등이 공동으로 주관한 ‘2000년 대희년과 순교자 시성준비를 위한 교회사 심포지엄’이 개최되었을 때, <황사영의 교회생활과 순교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다. 이때는 황사영에 대한 연구가 거의 전무할 때였다. 그때 최석우 신부님과 차기진 박사,방상근 박사. 윤민구 신부님도 함께 했다. 황사영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윤유일 순교자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부터였다. 이 천 어농 성지(8)가 개발되면서는 윤유일과 정은에 대한 평전도 썼다. 사실 오기선 신부님이 어농 성지 개발에 관여하셨다. 1987년에 성지 축성을 하기는 했는데. 이를 뒷받침할 학술적 근거가 미비하니 그 부분을 내게 부탁한 것이다. 윤유일 평전을 쓰면서 한국 교회사 전반을 체계적으로 보게 되었다. 자연스레 한국 교회사 공부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볼 만한 교회사 자료가 많지 않았다. 지금처럼 자료를 용이하게 찾아보기도 쉽지 않았고,

그래서 합정동에 있는 최석우 신부님 댁을 자주 찾았다. 그 까다로운 분이 나에게는 서고에 직접 가서 살펴보고 복사할 것 있으면 복사하라고 기꺼이 허락해 주셨다. 감사한 마음으로 신이 나서 자료를 복사하고 나니 최 신부님이 귀한 자료를 복사한 대신에 논문 한 편을 써내라고 했다. 그래서 쓴 것이〈순교일기의 전기문학적 성격〉이라는 논문이다. 이 글은 한국 천주교 회 창설 200주년 기념으로 간행된《한국 교회사 논문집 1》에 실렸다(9) 그 당시에는 논문 기고를 해도 원고료 받기를 기대할 수 없었다. 최 신부님께 논문 원고를 드리니 “이건 봉헌입니다” 하더라. 사실 처음에는 불교 가사를 연구하려고 자료를 많이 모았는데, 이상보(10) 교수가 자신이 불교가사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다고 하기에 내가 그때까지 모았던 자료를 다 주어버렸다. 그러고 나서 <만천유고>를 만나게 된 것이다. 

천주가사 연구는 내가 처음이었다. ‘천주가사’ 라는 이름 자체를 내가 지은 것이다. 언젠가 최 신부님이 내게 “당신은 천주가사의 개척자야.” 그러시더라. 그래서 내가 “그렇다면 신부님은 한국 교회사의 개척자이시잖아요” 그랬더니 얼른 “그런 소리 말어” 하셨다. <눌암기략>에 대한 소개도 내가 처음이었다. 언젠가 절두산에 가서 보니 한눈에 보기에도 중요해 보이는 책들이 먼지를 켜켜이 안은 채 쌓여 있었다. 그 먼지더미 속에서 찾아낸 것이 <눌암기략>이다. 관장 신부님께서 복사를 허락해 주셔서 조심히 다루어 복사를 뜨고 원본은 다시 절두산 박물관에 가져다 드렸다. 그리고 김동욱(11) 선생의 주선으로 천주가사를 주제로 국어국문학회에서 발표를 했다. 그런데 한참 후에 절두산에서 원본이 사라졌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내가 연구를 위해 복사해 놓았던 것을 다시 복사해서 가져다 주었다. 그러니까 절두산 박물관에서 그동안에라도 원본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절두산에 있는 것은 내가 가져다준 복사본일 것이다.

이후에《눌암기략》이 여러 사람에 의해 재인용되면서 과연 저자가 누구인가 하는 궁금증이 커졌다. 저자를 정확히 밝혀내지 못한 채였다. 나 나름대로 막연하게 <번암집>의 서문을 지은 홍시제가 아닌가 추측을 하며 진짜 저자를 추적하는 중에 ‘이재기’를 찾아냈다. 그리고 그가 광평대군(12)의 후손이라는 사실도 알아냈다. 수서 쪽에 있는 대종문희에 가서 "이재기라는 사람의 후손이 누구며, 어디에 살고 있느나" 하고 물었더니 평택에 살고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평택으로 찾아가 그 후손을 만났고 <눌암기략>이 그 사람 집에서 나온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족보를 통해서도 저자가 이재기 임을 확실하게 밝혀냈다.(13) 

한번은 한국교회사연구소로 최석우 신부님을 뵈러 갔는데《사학징의》를 보여 주면서 번역해 보라고 하셨다. “지금 번역은 힘듭니다” 하는 데도 굳이 책을 주시면서 “한 번 해 봐” 하셨다. 인연이 아니었는지 이런저런 사정으로 종국에는 번역을 못 했다. 그러나 그 책은 아직 가지고 있다. 후에 그 책은 조광 선생이 번역을 했다. 일전에 서종태 선생이 “어째서 이 책 번역을 안 하셨어요?" 하더라. 아무래도 나는 역사 쪽보다는 문학 쪽이니까 오히려《사학징의》부록이라 할 수 있는 <요화사서소화기>에 나오는 한글 교리서들에 관심을 두고 연구를 했다. 그리고 천주가사를 연구해 달라는 요청이 주로 있었다.

1976년에 번역한 이벽의  <성교요지>는 내 공부를 위해 번역한 것이다. 그 책 이 분량은 짧지만 참 어렵다. 사실 이성배 신부님도 <성교요지>의 번역을 요청했었다. 내가 번역한 <성교요지>를 보고 논문을 썼다. 김옥희 수녀님도 그랬다. 당시에는 일차 사료를 번역한 연구 자료집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어떤 주제로 논문을 쓰고자 해도 여러 언어로 저술된 사료들을 먼저 읽어 내는 일이 큰일이었다. 그래서 초기 한국 교회사 관련 연구를 위해 필요한 자료들은 직접 번역해서 봤다. 물론 그렇게 번역된 자료들을 다른 연구자들이 논문을 쓰는데 활용했으니 고마운 일이고 감사한 일이다. 

오기선 신부님과 최석우 신부님은 합정동에서 나란히 대문을 마주보고 사셨다. 자연히 거기 가면 양쪽을 다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곤 했다. 자료를 보러 갈 일도 많았다. 오기선 신부님이 가지고 있던 김기호의《봉교자술》필사본도 빌려다 보았다. 나중에 <성당가>를 주제로 글을 쓰면서《봉교자술》을 언급했는데, 그걸 읽으신 최 신부님이 내게 오 신부님께 그 책을 빌려다주기를 청했다. 대문만 열고 나가면 되는 데도 말이다. 편치 않은 두 분의 관계는 어느 한쪽의 잘못은 아니고 성향 차이였다고 본다. 최석우 신부님은 전형적인 학자 스타일이고, 오기선 신부님은 학자는 아니지만 끊임없이 역 사에 관심을 갖고 자료를 수집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계셨다. 무언가 새로운 자료가 생기면 우편으로 보내주시곤 했다. 천주가사의 ‘박동헌 본’도 오기선 신부님이 복사해서 보내준 것이었다. 오 신부님은 좀 과장이 심해서 큰일이지 정이 유난히 많은 분이셨다. 어쨌든 연구자에게는 자료를 주는 사람이 참 고마운 사람이다. 

1989~1999년까지 10년 동안 ’한일 가톨릭 문화 교류 사업’을 진행했다. 이 일도 오 신부님 때문에 시작된 일이다. 한번은 오 신부님이 임진왜란 당시 잡혀간 조선인 포로들을 조사해 달라고 하셨다. 아마도 오 신부님이 먼저 일본에 가서 이렇게 저렇게 조사를 하셨나 본데 당신 혼자 하시기에 힘이 부치니 내게 말을 꺼내신 듯 했다. 

우선 진해에 있는 웅천 왜성부터 답사를 시작해서 일본 나가사키를 방문했다. 그때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니 한국은 온통 벌거숭이로 붉은색인데 일본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짙푸른 초록색이었다. 우리는 언제 저렇게 되나 싶었는데 지금은 우리나라도 부럽지 않을 만큼 나무가 많이 심어졌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첫 답사의 스폰서는 오 신부님과 안면이 있는 여행사 대표였다. 당시 오 신부님이 성지연구원을 운영하고 계셨으니 아마 성지순례를 다니면서 만난 사람 같았다. 그리고 루카 출판사사장 한종오씨도 함께였다. 사실 오기선 신부님에게 일본 조사의 적임자로 나를 추천한 것이 한종오 씨였다는 이야기를 후일 들었다. 아무튼 당시 일주일 이상의 여정으로 나가사키로 떠났다. 오 신부님이 김수환 추기경님께 미리 부탁을 해서 나가사키 교구장에게 ‘이러저러한 일로 이런 사람들이 가니 잘 협조를 바란다’는 공문을 보내놓으셨다. 공항에 도착하니 ‘하성래 일행 환영’ 이라는 피켓을 들고 서 있더라. 그때 마중 나온 분이 일본 평협 사무총장 이시바시 씨였다. 그분의 안내로 나가사키 교구장도 만났다. 

교구장을 만난 자리에서 내가 “과거 한일 간은 참 불행한 시기였다. 그러나 천주교회 입장에서 보면 형제이지 않느냐? 그러니 문화 교류를 하면 어떻겠느냐" 하고 제안을 했다. 일본 측에서는 세 명의 신부가 나왔다. 그중 나이 많은 신부 한 분이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일본을 싫어하는데 문화 교류가 가당키나 하겠냐”며 헛수고 라는 듯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 신부는 일제 강점기에 학병으로 조선에 와 있으면서 양국 간의 관계를 직접 경험했다고 했다. 먼저 좋은 뜻으로 손을 내민 난 화가 났다. “신부님은 여기 싸우자고 온 것인가요? 아니면 회의를 하러 온 것인가요?" 하고 물었다. 자칫 분위기가 무거워질 상황이었다. 문화 교류가 무산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참석한 다른 신부가 강우일 주교와 상지대학 동창이라며 중재에 나섰다. “이러면 회의가 안 되지 않겠느냐. 서로 진정하자” 했다. 다시 회의를 시작했고 구체적인 문화교류 방법에 대해 논의했다. 

그때 내가 이종철(14) 신부가 지도하던 로사리오 성가대를 초청하여 일본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순교한 운젠에 가서 현양 미사를 드리자는 제안을 했다. 이것이 받아들여져 본격적인 한일 교류가 시작되었고, 매년 성가대를 인솔하여 일본으로 갔다. 일본에는 마츠리 (祭0)가 각 지역별로 많이 있다. 그중 ‘남만 마츠리’ (南變祭0)라는 것이 있었다. 가톨릭이 일본에 들어 올 때 필리핀에서 왔기 때문에 남쪽에서 왔다고 남만 마츠리’ 라 했다고 들었다. 이 마츠리가 매년 성모몽소승천 대축일 때인 8월 14~15일에 히라도(15)에서 이루어진다. 하비에르 상륙 기념비가 있는 곳이다. 그때 차기진 박사도 나랑 같이 갔었다. 자양동 성당 성가대, 압구정동 성당 성가대. 인천 성당 성가대 등 여러 성당 성가대를 한 50여 명씩 인솔하여 갔었다. 그쪽에서는 성당 성가대가 없어서 모집된 순례단이 한국을 방문하곤 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홈스테이였다. 일본에서는 우리 교류단을 하루 정도 신자들의 집에서 재워 주었다. 3박 4일로 갈 경우 하루 숙박비를 절약할 수 있어 우리에게는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되었다. 홈스테이를 통해 서로 간 벽도 허물고 진정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일본 천주교회 신자들의 신앙생활 모습도 직접 볼 수 있었는데, 조만과를 열심히 바치는 일본인들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런 경험을 한 우리 신자들도 탄복했다. 가와하라 히라도 총회장은 내게 “친구, 친구” 하면서 회식 자리에서 술 석 잔을 두고 무릎 꿇고 맹세하는 ‘삼삼구도’(三三九度)를 하며 우리의 우정을 변치 말자고 했다. 

교류단을 인솔하여 다니면서 내가 통역도 하고 일본 교회사를 설명하기도 했다. 일본어를 지금까지 잊지 않고 쓸 수 있는 것은 물론 국민학교 때 배운 것도 있지만, 중고등학교 때 우리말 참고서를 구하기 어려워 일본어 참고서로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어로 설명을 하거나 통역하는 데 별 어려움은 없다. 그렇게 한일 간 교류가 10년 동안 이어지면서 일본 신부들과 평신도들도 많이 알게 되었다. 우리는 주로 8월에 가고 일본에서는 주로 겨울이나 초봄에 왔다. 한번은 12월에 일본 순례단이 왔는데 눈이 실하게 왔다. 그날 미리내 성지를 방문했는데 버스 안에서 설경을 보고 아름답다고 손뼉을 치고 감탄을 하면서 굉장히 좋아했다. 나가사키에서는 눈을 볼 수 없으니 그럴 수밖에. 그런데 버스에서 내려 구경을 하다가 너무 춥다고 발을 동동 구르며 추위를 견디지 못하더라. 

10년 동안 교류가 이어졌지만 우리나라 교회의 지원은 전혀 없었다. 오히 려 일본 나가사키 교구에서 우리 순례단에게 10만 엔 정도를 보조해 주었다. 참 고마운 일이었다. 일본에서도 홈스테이를 했으니 우리도 해야 하지 않느냐 해서 처음에는 좀 산다는 동네의 신자들에게 부탁했는데 못 한다더라. 그래서 이천 성당 신자들에게 부탁을 해서 한 번 성사를 시켰다. 그렇게 홈스테이를 하고 나니 나중에는 그분들끼리 서로 친해져서 개인적으로 연락도 하고, 오고 가고 했다. 

아마 교회에서는 우리가 이런 교류를 하고 있는지 몰랐을지 싶다. 알았다 하더라도 지원하기는 힘들었을 것이고. 여러 해 일본을 다니면서 보고들은 게 많았다. 오우라 성당에 가서는 갈매못 성지에서 순교한 성인들이 모셔져 있던 지하 유해실도 들어가 볼 수 있었다.(16) 내 책상 위에 있는 십자고상도 그때 얻은 것이다. 히라도 가까이 이키스키 섬에 있는 순교자무덤 위에 소나무가 자랐는데 어느 해인가 그 소나무가 말라 죽었다. 그래서 그 소나무를 베어 가지고 대형 십자가를 만들고 작은 십자고상을 몇 개 만들었다. 그중 하나가 내게 온 것이다. 그러니 참 소중한 인연이다. 

1999년 마지막 교류 이후 더 이상 그 일을 진행할 수 없었다. 일본에서도 더 이상의 보조금을 주지 못하는 형편이 되었고 우리 쪽에서도 교구 차원의 보조가 없고 그러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시마모토 대주교(17) 때까지는 교류가 이루어 졌었는데 이제는 그분도 돌아가시고…. 

그 문화 교류를 통해 얻은 결실이라면 우리 신자들이 받은 감동일 것이다. 일본에 가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또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들의 신앙생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많이 알게 되었다. 반면 일본 사람들도 우리나라에 와서 큰 감동을 받았다. 자신들도 박해 기간이 있었고 한국도 박해 기간이 있었는데 한국 천주교회의 교세가 어떻게 이처럼 성장할 수 있었나 하는 사실에 놀랐다고 했다. 그리고 카쿠레 기리시탄과도 다른 점이 많다며 참 의미 있는 여행이라는 말들을 했다. 물론 이런 교류가 다시 이어졌으면 좋겠 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때보다는 우리나라 신자들에게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여력이 많이 생겼고, ‘가깝고도 먼 나라인’ 두 나라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형제적인 사랑을 키워나간다는 의미에서도 좋지 않겠나. 

나의 삶을 돌이켜보매 아이들 생각을 먼저 하게 된다. 애들 셋이 같이 대학을 다녔다. 두 살 터울인데 군대 다녀오고 의대생이니 오래 다니고 그렇고, 셋째는 제대로 가고 그렇게 셋을 보내는데 학비 때문에 힘들었다. 그래서 서초동에 있던 땅을 팔아서 학비를 대었다. 교사라서 교원 공제회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었는데도 다달이 이자 내는 게 싫어서 그 땅을 팔았다. 물론 그 땅을 팔지 않았다면 지금은 몇 십 억이 되었겠으나, 우리 아이들과 내가 그 돈 덕에 별로 고생 안 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생각한다. 

처음에는 가정부를 두고 아이들을 키웠는데 쉬 들고나기도 하고 또 아이들과 잘 맞지도 않고 해서 힘 들었다. 내가 애타하는 것을 보던 동네 할머니 한 분이 아이들을 돌봐 주시겠다고 했다, 그분이 ‘학중이 할머니’ 시다, 우리 애들 수발을 17년 동안 들어주셨다. 처음에는 우리 옆집에 사셨는데 당신 집을 팔아서 아들 사업 자금을 대주고 우리 집 1층으로 이사 와서 사셨다. 아이들을 돌봐주시는 대신에 전셋값은 안 받았다. 그래도 월급은 드렸다. 

사람이 사는 데 어려운 일이 왜 없었겠는가.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별로 겪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혼자 키우면서 경제적인 곤란까지 겪었다면 아마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다. 무엇보다 신앙은 남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지팡이 같은, 나를 붙잡아주는 ‘지팡이’였다, 그래서 주변에서 부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에게 성당을 다녀 봐라 하면서 인도하기도 했었다.

아이들 결혼시킬 때면 아내 생각이 많이 났다. 애들이 ‘엄마’라고 평생 불러보지 못했고 엄마의 사랑을 모르고 컸다. 그런 점이 안타깝다. 큰애들 가족은 모두 성당에 다닌다. 다른 아이들은 아직 아니다. 그러나 신앙은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니기에 강요하지는 않는다, 언젠가는 돌아오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기도는 열심히 한다. 

대부이셨던 류홍렬 선생님께는 지금도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산다. 또 대학 동창 가운데 한 명은 내가 아이들 학비로 허덕일 때 도움을 주기도 했다. 마음이 심란할 때 속 얘기를 털어내면 들어주던 친구였다. 지금은 소식이 끊겼지만 무시로 감사한 마음으로, 추억을 떠올린다. 그런 사람들이 곁에 있어서 아이들을 키울 수 있었다. 

기억을 되살리다 보니, 지나간 세월이 남의 이야기처럼 띄엄띄엄 떠오른다. 과연 나는 우리 집 당호처럼 ‘수졸(守拙)(18)하게, 사람들에게는 못나 보이지만, 하늘에 부끄럽지 않게 분수를 지키며 그렇게 살았는가 하는 자책이 앞선다. 내 방에 걸려 있는 왕지환의 <등관작루>에 나오는 구절처럼 “천리의 눈으로 끝 간 곳을 보고자 다시 한 층 높은 다락을 오르는” 심정으로 그저 게으름을 경계한다. 배우고 깨우치는 공부의 산은 깊고 깊어 간혹 세상의 때를 놓친다. 그럼에도 읽기와 쓰기를 멈출 수가 없는 것은 천리의 눈으로 끝 간 곳을 보고 싶어서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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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호에 이어 이번 호까지 규운(圭雲) 하성래(河聲來. 아우구스티노)선생님의 신앙과 삶을 2회에 걸쳐 연재하였습니다. 지나간 기억들을 깊은 우물에서 두레박질하듯 하나 둘 떠올리는 선생님의 자분자분한 목소리는 짧은 겨울햇살이 스러지기 전 눈부신 정점에 이르러서야 끝을 맺었습니다.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몇 걸음을 걷다 문득 돌아서니 “아침에 푸른 실 같던 머리카락이 어느새 눈처럼 센” 선생님이 차도 사람도 바삐 지나가는 거리에 서 계섰습니다, 여기 하성래 선생님의〈자찬묘지명》을 옮겨 적으며 글을 끝맺습니다. “하성래는 1935년 화순에서 조선 후기 실학자 규남 하백원 선생의 6대손으로 하태영 님과 류귀례 님의 장남으로 태어나 광주고. 조선대학교를 졸업, 고려대학교에서 <천주가사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고려대, 수원 가톨릭대, 안양대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데 헌신하였다, 그는 인생을 ‘참고 견디고 이긴다’ 는 신념으로 살았다. 그 결과 저서로<천주가사 연구>.<순교자 윤유일・정은 평전>,<무명 순교자의 뿌리를 찾아서>.<빛의 사람들>,<나의 향기>등과 몇 편의 중요한 논문을 남겼다.”一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