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을 쓰고 나서 류홍렬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당시 류 선생님은 성균관대학 대학원장이셨다. 류 선생님이 “이렇게 논문까지 쓰고 천주교 신자가 아닌 것이 말이 되냐”며 “세례는 언제 받을 거냐”고 물었다. 내가 순순히 “곧 받겠습니다.” 했더니 그 자리에서 바로 전화기를 잡고는 “지금 사는 곳이 어디지?” 하더라.“가회동이요” 했더니 바로 가회동 성당으로 전화를 했다. 이계광(1) 신부님을 바꾸라 하더니 대뜸 “내가 사람 하나 보낼 테니 이마에 물 부어줘” 그러셨다.
나중에 들어 보니 당시 가화동 본당주임이었던 이계광 신부님은 류 선생님의 제자였다. 곧 이 신부님을 찾아가 뵈었다. 이 신부님은 <사목>, <경향잡지> 등에 실린 내 글을 벌써 봤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교리를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으니 교리 배울 것도 없이 차나 마시면서 이야기나 하다가 부활절에 와서 세례받으면 됩니다.” 하셨다. 그래도 “제가 교리를 배우러 나오겠습니다” 했더니 그러면 “내가 부담스러워” 하더라. 그래서 결국 교리 공부는 안 나가고 부활절에 가서 세례를 받았다. 그때가 I975년이었다. 오기선 신부님께 “세례명은 어떻게 할까요” 했더니 “그건 대부가 정하는 거야” 하셨다, 류선생님께 물었더니 “자네는 학자니까 아우구스티노로 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물론 대부도 서 주셨다.
내 신앙 이야기를 하면서 류홍렬 선생님을 빼놓을 수 없다. 대부로서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신 분이다. 말 그대로 아버지 대신이셨다. 류 선생님은 돈암동 성당에 다니셨는데 힘든 일이 있을 때 찾아뵙고 의논드릴 수 있어 참말 의지가 되었다. 내가 대학 강단에 설 때 추천서도 써 주셨다.
세례를 받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부모님도 딱히 뭐라 하지는 않으셨다. 우리 집안이 노론 골수였는데, 내가 천주교에 관한 글, 특히 다산 정약용에 관한 글을 자주 쓰니 아버지께서 ‘요새 네가 자주 남인을 옹호하는 글을 쓰던데 혹시라도 선대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조심해라’ 하는 편지를 보내셨다. 그 편지 한 번 뿐, 특별히 반대하거나 하지는 않으셨다.
스스로 생각할 때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는데 어떤 거부감이 없었던 이유는 천주가사 연구를 하면서 내가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 권철신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권철신, 이벽. 정약전 이런 사람들 모두 대표적인 유학자이지 않았나.
천주가사 연구를 시작으로 천주교회와 관련된 다양한 논문을 발표하였고,(2) 여러 글을 신분이나 잡지, 사보 등에 기고했다. <자명종과 나경적이라는 사람>을 월간<뿌리깊은 나무>(1970년 11월호)(3)에 쓴 적이 있다. 나경적(4)은 규남 할아버지와 한 마을에 살던 과학자였는데, 당신의 이름을 듣고 야사리에 찾아온 홍대용(5)과 함께 혼의를 만들었다. 규남 할아버지도 자명종을 만드셨다. 당시 우리 집이 대단히 컸는데 사랑채에 걸어둔 자명종 소리가 안채까지도 들렸다고 한다. 한참 후에 그 자명종과 계영배(6)를 찾으러 규남 할아버지 셋째 아들의 처가 후손인 양문수 씨가 사는 순창에 갔다. 가서 보니 일제 때까지 계영배와 함께 자명종이 있었는데 일본 순사가 빌려 간 이후 돌려주지 않았다고 하더라. 정말 아까운 일이다.《뿌리깊은 나무》에 실린 글을 보고 오리엔탈이라는 시계를 만드는 회사에서 글을 써 달라고 연락이 왔다. 그 덕에 한국의 시계사(時計史)를 오리엔탈 사보에 오랫동안 연재했다.
1975년에 쓴 김기호의〈피악 수선가〉를 한국교회사연구소 월례발표회에서 발표했다. 이후 박해 시대의 신학 교육과 성직자 양성, 황사영의 교회 활동과 순교에 대한 연구,《눌암기략》(7)의 저자 및 내용에 대한 소고,〈사학징의》의〈부요화사서소화기〉중 한글로 번역된 교리서, 초기 신자들의 교리 이해 등을 차례로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