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래 은사님 회고1

■ 살레시오고 11회 동문회ㅣ살레시오고 서울동창회ㅣ살레시오고 총동창회

교회와 역사 -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2014.1월호(제464호)

규운(圭雲) 하성래(河聲來. 아우구스티노) 박사

내가〈사향가〉니 <피악수선가>니 하는 ‘천주가사’를 가사문학의 한 장르로 세우고,‘천주가사’라는 용어를 정립하고 사용했다.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던 처음에는 오로지 문학적인 관심으로 ‘천주가사’에 접근했으나, 이를 연구하여 논문을 쓰기 위해서는 천주교 교리와 천주교 용어에 대한 공부가 필요했다. 그래서 교리를 공부하였고 신앙으로 믿게 되었다. 내가 천주가사를 주제로 삼아 논문을 쓰게 된 계기는《만천유고》(1)를 만났기 때문이요, <만천유고>를 만난 것은 돌아가신 6대조 할아버지 규남(圭南) 하백원(河百源》(2)의〈만국전도〉(3) 덕분이다. 

1935년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무등산 동쪽 기슭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누이동생이 하나, 아들이 3형제 해서 4남매였다. 해방될 때까지 거기서 살다가 해방 후에 광주로 나왔다. 아버지는 그 당시 은행원이셨다. 
이서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는 광주에서 다녔다, 광주사범 병설 중학교였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고등학교는 광주고등학교(광주 서중 전신)를 다녔다. 그때 당시에는 광주일고가 없었다, 6・25를 중학교 3학년 때 맞았다. 열일곱 살이었나, 학도 의용병으로 나가 공비 토벌을 하기도 했다.

야사리에 있던 할아버지 집은 좀 컸다. 규남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했다. 규남 선생의 첫째 부인은 일찍 돌아가셨고 우리 할머니가 둘째 부인이 셨다. 그래서 둘째 집인데 종가 역할을 했다. 둘째지만 큰집 노릇을 했다. 집 마당에 한 300년 된 커다란 매화나무가 있었는데 우리 할머니가 그 밑에 솥을 걸어 놓고 팥죽을 끓여서 가난한 사람들을 먹였다. 6 • 25 때 막내 삼촌이 육사 2기라서 군인 가족으로 죽을 뻔 했는데 우리 할머니 덕에 살았다. 택호가 수남이어서 할머니를 ‘수남 마님’으로 부르곤 했는데 누군가 우리 가족을 죽이라고 선동했을 때. 동네 사람들 대부분이
 "넌 수남 마님 죽 안 먹고 컸냐"
 하면서 우리를 피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피난을 가면서 아버지는 곡식을 지고 난 서책이며 서화를 한 짐 짊어지고 나왔다, 그걸 보더니 사람들이 그런 게 무슨 소용이라서 가지고 나오냐 했다. ‘쌀이라도 한 말 짊어지고 나오지’하면서 혀를 찼다.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선대부터 모아 온 많은 유물이 집과 함께 다 타버렸다. 그나마 남았던 서화나 서책들은 전쟁이 끝나고 집을 새로 지으면서 벽에 발라버렸다, 어머니가 글씨를 아주 잘 쓰셔서 시집올 때 필사해서 가져온 책들이 버들고리 하나에 가득하였다. 그런데 그 귀한 것들을 모두 그렇게 없애버렸다. 그래서 지금 남은 건 <공자문답> , <조운전>,<두껍전> 등 몇 권뿐이다. 만일 지금 그 서책이나 간찰들을 가지고 있다면 수십억 원의 가치가 있었을 텐데…아니다. 그 가치를 가늠하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시골집 널따란 대청에는 검은 붓함 30여 개가 있었는데 그 안에 서책이나 서화가 가득했다. 참말 만 권의 서책을 가지고 있었다. 6・25 때 집에 불을 지른다 해서 중요한 것들을 논바닥 가운데로 옮겨 이엉을 덮어 놨는데 거기까지 쫓아와서 불을 질러 버렸다. 속절없이 다 타버렸고. 오히려 정신없이 끌어내기는 했지만 미처 처리하지 못하고 담장 옆에 버려두었던 것은 그 나마 건졌다. 그때 잿더미가 되어 버린 것들은 지금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참 아까운 것들이다. 

이성무《전 국사편찬위원장》, 김시업《실학박물관장》선생 등 ‘실학자 후손들의 모임’(실학자 패밀리) 사람들이 한번 야사리에 내려와서 보고는 그 옛날에 만 권의 서책을 모은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냐며 놀라워했다. 김시업 관장은 “이런 촌에서 ‘규남’이라는 대단한 학자가 나왔다는 게 더 놀랍다”는 말을 했다.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해방이 되었다. 살기가 이미 팍팍했는데 엎친 데 덮 친다고 한국 전쟁이 터졌다. 전생통에 집안 형편은 말도 못하게 어려워졌고 대학을 다니는 것도 쉽지 않게 되어 전액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조선대학교 문학과에 입학하였다. 돈을 벌어야 해서 대학도 줄곧 다닐 수 없어 여러 차례 나누어 다녀야만 했다. 

이미 말한 것처럼 이런저런 사정으로 휴학을 했다가 다시 학교에 가게 되었다. 강의실에 들어섰는데 여러 학생 사이에서 두 명의 여학생이 눈에 띄었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안사람이었다. 안사람은 나보다 두 살이 어린데 내가 학교를 쉬다 다니다 하는 바람에 같이 다니게 된 거였다. 더구나 같은 과 여학생이었다. 당시 여대생을 찾기는 쌀의 뉘처럼 희귀한 일이었다. 그러니 어쩌면 모든 남학생이 그 여학생들과 사귀고 싶어 했을 것이다. 

언젠가 수업 중에 나의 은사이신 시인 김현승 선생님이 “내가 거리에서 우연히 하성래 군 아버님을 만났는데 대단히 훌륭하신 선비시더라” 하는 말을 하셨다. 그 말씀 덕분에 동료 학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기도 하였다. 그래서 안사람이 나를 좋게 보았는가. 어쨌든 우리는 조선대학교 캠퍼스 커플 1호가 되었다. 물론 소문이 나서 학생들이 우리 사이를 다 알았지만 지금 사람들처럼 그렇게 대놓고 사귀지는 못했다. 슬쩍슬쩍 주위를 살피면서 몰래몰래 아슬아슬하게 연애를 했다.

그러다가 결혼 말이 오가기 시작했는데 양쪽 집안에서 모두 반대를 했다. 안 사람은 재력 있는 집안의 둘째 딸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 경제 발전을 위해 일본에서 한국인 기업가를 불러들였는데 장인어른이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과 함께 들어온 분이셨다. 그러니 ‘시골 가난한 집 사내에게 시집보내고 싶지 않다’였고. 우리 집에서는 ‘우리가 호남의 명가인데…아무리 없이 살게 되었더라도…’ 하는 의견 대립이 있었다. 

그 반대를 물리치고 1960년 12월 28일에 결혼을 했다. 방 두 칸짜리를 얻어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난 고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처음에는 조선대 부속고등학교,다음에는 살레시오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광주에서 교사를 하면서 지역 사회 내에서 참 안정적으로 편하게 살았다, 살레시오 고등학교에서 선생으로 재직하는 때는 교장 선생님이 이탈리아 분이셨는데 얼마나 친절한지 항상 아침마다 원두커피를 내려놓고 선생들을 맞았다. 방과 후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으면 커피와 비스킷을 가져다주면서 먹으면서 공부하라고 했다. 또 초과 근무에 대한 수당을 별도로 지급할 수 없으니 일찍 퇴근하라고 종용하기까지 했다, 그런 여유 있는 환경이었기에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고전문학 관련 논문을 쓰려고 했는데. 막상 광주에는 그런 자료를 볼만한 곳이 없었다. 그래서 자주 서울을 오르내리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서울을 다니게 된 동기는 우리 집에 있던 규남 할아버지의 지도 덕분이었다. 우리 집에 규남 할아버지가 그리신〈만국전도〉와  <동국지도>가 있었는데 규남할아버지 지도가 김정호의〈동국지도〉보다 51년이 앞선 것이었다. 그 사실이 어느 기회에 5대 일간지에 전부 보도되었다. 그러자 그 기사를 보고 숭실대 박물관장이던 김양선 목사가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 ‘지도를 보고 싶은데 고혈압으로 쓰러져 병석에 누워 있으니 서울 오는 길에 집으로 와서 만나줄 수 있느냐’ 하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그 집에 가서 점심을 먹으면서 그분이 가지고 있는 희귀한 자료들을 다 직접 볼 수 있었다. 거기서 정훈(4)의《수남방옹유고》와  <만천유고>를 처음 봤다. 김양선 목사는 우리 집에 있는 <만국전도〉와 <동국지도〉를 복사하고, 난 <만천 유고> 등을 복사하는 조건으로 서로 자료 교환을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광주에서는 연구를 진척시키기가 도저히 힘들어서 서울로 올라왔다. 온 가족이 함께 오려고 했었지만, 일단은 나만 올라왔다. 서울 대동상업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막내가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산후 문제로 애 엄마가 먼저 갔다. 서울에서 근무하던 중이라 임종도 못 봤다. 안사람이 6월에 그렇게 되고 그 해 12월에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여섯을 데리고 왔는데 큰애가 열네 살, 여섯째가 세 살이었다. 막내는 너무 어려 장모님과 애들 이모가 키울 수밖에 없었다. 아내 묏자리는 아버지가 잡아 주셨는데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명당이었는지 2009년 면례 때 보니 손가락 하나까지 그대로 있어서 참 신기했다. 산도 높고 멀어서 아이들이 보러 다니기도 힘들고 해서 진달래 공원으로 옮겼다. 

1974년에 자양동 이 집으로 이사 와서 여직 살고 있다. 남들이 일곱 아이를 어떻게 혼자 키우며 살았느냐고 묻곤 한다. 물론 그렇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와 상황이 있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제자들의 집안 내력까지 자세하게 알게 된다. 가르치는 학생 중 한 애가 참 많이 비둘어졌었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은 배가 고파서 힘들고 학비를 못 내서 학교 다니기 힘든데 너는 집도 부자고 부모도 다 계시는데 왜 이러냐” 
하고 물었더니,

 “선생님도 우리 집에 와서 한 달만 살아보세요. 저는 집을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래서 가정사를 더 알아 봤더니 계모 슬하에서 마음에 상처를 많이 받으면서 자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혼자 생각하기를 ‘계모 밑에서 사는 것이 참 어렵고 힘들구나’ 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으나 아무튼 재혼을 생각할 때면 그 아이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재혼을 안 한 거다. 내가 힘들지만 혼자서 키워보자 한 거다. 

지난번<영혼의 횃불>,출판 기념회 때 사회자가 가족 대표로 큰 아들에게 이야기를 하라고 하니 그 아이가 일어나 “저는 공학박사입니다” 하더니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 있다가 겨우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제가 열네 살이었습니다” 하더라. 혼자 살면서 힘든 때도 많았다. 말로 어떻게 다하겠는가. 그러나 아이들이 잘 커 주어서 거기에 마음을 두고 살았다. 막내딸이 마지막까지 나랑 살다가 시집을 갔다. 그러고 나니 큰 며느리가 합치자고 하는데 내가 혼자 더 살아보겠다고 했다, 며느리가 넷인데 그중 하나가 토요일마다 여기 와서 청소하고 빨래하고 간다. 시아버지 혼자 산다고. 그 며느리가 한가한 애가 아닌데, 내가 딸들 한테 "너희는 시부모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물어도 보았다. 참 자랑할 만한 며느리다. 

1975년에 <만천유고>에 실린 가사를 바탕으로<천주가사 연구>라는 첫 논문을 썼다. 그리고 논문을 류홍렬(6) 선생께도 보냈다.논문을 쓰기 위한 자료 조사를 하러 다닐 때 류홍렬 선생님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오기선(7)신부님 소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기선 신부님을 만나게 된 것도 천주가사 연구를 하게 되면서이다. 천주가사를 연구하려면 천주교 용어를 알아야 하는데 내가 유림 골수였다. 천주교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논문을 쓰는 것이 참 답답한 일이었다. 천주교에 대해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는데 당시 천주교회 용어가 참 어려웠다. 그래서 제일 먼저 절두산 박물관을 찾아갔다. 거기서 오기선 신부님을 만났고 박희봉(11) 신부님도 만났다. 그리고 최석우(9)신부님을 알게 되었다. 최 신부님은 당시 가회동 본당 주임 신부였다. 그때 최신부님은 젊었고 면도칼처럼 찬바람이 쌩쌩 불던 때였다.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용건을 말씀드렸더니,순순히 “지하실에 가서 뒤져봐라” 하시더라. 거기서 여러 천주가사자료들을 찾아냈다. 

<옥중제성가>, <삼세대의> 등등을 거기서 보게 되었다. 그래도 천주교 교리와 용어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윤형중(10) 신부님을 찾아 가라고 했다. 윤 신부님이 <상해천주교요리〉상. 중. 하권을 쓰셨다. 내게 중 • 하권은 있었는데 상권이 없었다. 찾아 뵙고 그 말씀을 드렸더니 윤 신부님이 당신이 보시던 책을 주셨다. 그 책을 보며 천주교 교리를 공부하였고 논문을 완성했다. 얼마 후에 윤 신부님은 돌아가셨다. 윤 신부님이 주신 그 책은 여태 가지고 있다. 

내 논문을 받은 류홍렬 선생님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내라고 주소를 주셨다. 그때 주소를 받은 분들이 이원순 선생, 김옥희 수녀, 주재용(11) 신부 등이었다. 그분들께 책을 보내고 나서 류 선생님이 <사목>에 논문 기고를 하도록 소개했다. 이후에 <경향잡지>에도 류 선생님 소개로 글을 썼다. 천주교 신자도 아닌 내가 말이다. 나중에 이원순 선생님이 교리신학원과 가톨릭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내 논문을 읽어보고 리포트를 내라 하셨다고 들었다. 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님도 신학대 그 논문으로 나를 알게 되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