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사향가〉니 <피악수선가>니 하는 ‘천주가사’를 가사문학의 한 장르로 세우고,‘천주가사’라는 용어를 정립하고 사용했다.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던 처음에는 오로지 문학적인 관심으로 ‘천주가사’에 접근했으나, 이를 연구하여 논문을 쓰기 위해서는 천주교 교리와 천주교 용어에 대한 공부가 필요했다. 그래서 교리를 공부하였고 신앙으로 믿게 되었다. 내가 천주가사를 주제로 삼아 논문을 쓰게 된 계기는《만천유고》(1)를 만났기 때문이요, <만천유고>를 만난 것은 돌아가신 6대조 할아버지 규남(圭南) 하백원(河百源》(2)의〈만국전도〉(3) 덕분이다.
1935년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무등산 동쪽 기슭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누이동생이 하나, 아들이 3형제 해서 4남매였다. 해방될 때까지 거기서 살다가 해방 후에 광주로 나왔다. 아버지는 그 당시 은행원이셨다.
이서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는 광주에서 다녔다, 광주사범 병설 중학교였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고등학교는 광주고등학교(광주 서중 전신)를 다녔다. 그때 당시에는 광주일고가 없었다, 6・25를 중학교 3학년 때 맞았다. 열일곱 살이었나, 학도 의용병으로 나가 공비 토벌을 하기도 했다.
야사리에 있던 할아버지 집은 좀 컸다. 규남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했다. 규남 선생의 첫째 부인은 일찍 돌아가셨고 우리 할머니가 둘째 부인이 셨다. 그래서 둘째 집인데 종가 역할을 했다. 둘째지만 큰집 노릇을 했다. 집 마당에 한 300년 된 커다란 매화나무가 있었는데 우리 할머니가 그 밑에 솥을 걸어 놓고 팥죽을 끓여서 가난한 사람들을 먹였다. 6 • 25 때 막내 삼촌이 육사 2기라서 군인 가족으로 죽을 뻔 했는데 우리 할머니 덕에 살았다. 택호가 수남이어서 할머니를 ‘수남 마님’으로 부르곤 했는데 누군가 우리 가족을 죽이라고 선동했을 때. 동네 사람들 대부분이
"넌 수남 마님 죽 안 먹고 컸냐"
하면서 우리를 피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피난을 가면서 아버지는 곡식을 지고 난 서책이며 서화를 한 짐 짊어지고 나왔다, 그걸 보더니 사람들이 그런 게 무슨 소용이라서 가지고 나오냐 했다. ‘쌀이라도 한 말 짊어지고 나오지’하면서 혀를 찼다.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선대부터 모아 온 많은 유물이 집과 함께 다 타버렸다. 그나마 남았던 서화나 서책들은 전쟁이 끝나고 집을 새로 지으면서 벽에 발라버렸다, 어머니가 글씨를 아주 잘 쓰셔서 시집올 때 필사해서 가져온 책들이 버들고리 하나에 가득하였다. 그런데 그 귀한 것들을 모두 그렇게 없애버렸다. 그래서 지금 남은 건 <공자문답> , <조운전>,<두껍전> 등 몇 권뿐이다. 만일 지금 그 서책이나 간찰들을 가지고 있다면 수십억 원의 가치가 있었을 텐데…아니다. 그 가치를 가늠하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시골집 널따란 대청에는 검은 붓함 30여 개가 있었는데 그 안에 서책이나 서화가 가득했다. 참말 만 권의 서책을 가지고 있었다. 6・25 때 집에 불을 지른다 해서 중요한 것들을 논바닥 가운데로 옮겨 이엉을 덮어 놨는데 거기까지 쫓아와서 불을 질러 버렸다. 속절없이 다 타버렸고. 오히려 정신없이 끌어내기는 했지만 미처 처리하지 못하고 담장 옆에 버려두었던 것은 그 나마 건졌다. 그때 잿더미가 되어 버린 것들은 지금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참 아까운 것들이다.
이성무《전 국사편찬위원장》, 김시업《실학박물관장》선생 등 ‘실학자 후손들의 모임’(실학자 패밀리) 사람들이 한번 야사리에 내려와서 보고는 그 옛날에 만 권의 서책을 모은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냐며 놀라워했다. 김시업 관장은 “이런 촌에서 ‘규남’이라는 대단한 학자가 나왔다는 게 더 놀랍다”는 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