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던 야사리 마을 앞으로는 무등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시냇물이 있다. 이 물은 적벽강으로 흘러든다. 지금은 동복땜이 건설돼 적벽은 절벽의 반이 수몰되고 광주시민의 수원지로 변했지만, 내가 어릴 때는 물이 맑기가 명경 같았다. 명경지수(明鏡止水)란 이런 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석간수가 차고 달았다. 야사에서 흘러온 물은 창랑에서 흘러온 물과 학당리에서 합류하여 노루목을 굽이돌아 적벽강으로 들어간다. 학
당리 뒷산은 반들거리고 푸르기가, 학이 소나무에서 발을 굴려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하였다.
이 학당리에서 노루목까지는 물줄기가 S자 형으로 굽이돌며 양안의 절벽이 병풍 같다. 이 물줄기가 흘러와 절벽과 맞닿는 곳을 적벽이라 부른다. 길이 300여m, 높이 30여m, 수심 3·4m의 장엄한 병풍을 두른 듯하다.
적벽하면 소동파(蘇東坡)의 장시 「적벽부」가 생각난다. 절벽 밑에 푸른 강물이 출렁이는 이 절경을 보고 1519년(중종14) 기묘사화 때 동복현으로 유배된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 1483-1536)가 적벽이라고 명명하였다. 소동파가 「적벽부」를 읊은 적벽은 가보지 못해 그 아름다움을 알 수 없지만, 내 고향 적벽은 절벽과 산과 물이 신비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신선이 사는 듯한 꿈의 경치를 만들어 낸다.
밤에 배를 타고 옹성산 위로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면 배에서 일어나 달을 잡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절벽 밑의 깊고 검푸른 물은 용이라도 숨어 사는 듯 두렵고 무서웠다. 절벽 중간에는 언제 누가 올라가서 썼는지 알 수 없지만 ‘적벽동천(赤壁洞天)’이라는 붉고 큰 글씨가 조각돼 있다. “저 절벽을 어떻게 올라가서 글씨를 쓰고 조각을 했을까?” 어린 내게는 그것이 한없이 궁금하였다.
노루목에서 흘러오는 거센 물줄기가 절벽에 부딪히면서 물을 깊게 만들고 강변에 백사장을 만들었다. 바다를 보지 못하고 자란 나는 초등학교 때 이곳으로 소풍을 오면 이곳이 마치 바다인 듯 착각하며 마음이 맑고 시원하기가 하늘에 닿을듯하였다. 배를 타고 노래를 부르며 배 밑으로 보이는 투명한 조약돌과 고기들을 보며 손으로 잡은 듯 기쁜 소릴 질렀다.
팔월 한가위 때는 적벽에서 낙화놀이를 한다. 절벽 꼭대기로 올라간 장정들이 나무에 몸을 묶고 초깔에 불을 댕겨 강물로 던지는 것이다. 그때 불꽃 떨어지는 모습이 낙화암에서 삼천 궁녀가 떨어지는 거와 같이 장관이었다. 불꽃이 떨어지는 때면 사람들은 술을 마시며 함성을 질렀다. 이 놀이를 낙화놀이라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낙화놀이가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 강변 백사장에는 망미정(望美亭)이 있다. 망미정이란 이름은 「적벽부」 속에 “망미인혜천일방(望美人兮天一方 = 저 하늘 끝에 있는 미인(임금)을 생각함이여!)” 하는 구절이 있는데, 거기서 따다가 지은 듯하다. 여기서는 선비들이 모여 시회를 열고 활을 쏘며 술을 마셨다.
소동파가 「적벽부」를 지은 것이 1082년 임술년이었다. 그러므로 이 고장 선비들은 600년이 지나 1682(숙종8)년 임술년이 돌아오자, 하성구(河聖龜) 반학공(伴鶴公)을 중심으로 망미정에 모여 시회를 열었다. 그 후 또 60년이 지나 1742년(임술, 영조8)에는 하영청(河永淸) 병암공(屛岩公)을 비롯하여 62명이 모여 시회를 열었고, 또 60년이 지나 1802년(임술, 순조2)에는 규남(圭南) 하백원(河百源) 선생을 중심으로 51명이 모여 세 번째 시회를 열었다. 무려 180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이때 읊은 시들을 모아 엮은 책이 『적벽삼유록, 赤壁三遊錄』이다.
나는 『적벽삼유록』의 책장을 넘기면서, 또 그 시들을 읽으면서, 옛 시인들의 풍류와 낭만, 그 시인들이 사랑한 내 고향 산하 적벽과 조국의 산하를 나 역시 무한한 애정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았다.